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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볼만한 곳

[당진 우강면 김대건 신부 생가]

by 많은이용 2011. 7. 16.

[당진 우강면 김대건 신부 생가]

죽음으로 신앙 지켜낸 한국 최초의 신부 그의 자취엔 솔내음만 가득
 한국천주교의 출발지이자 성지…올해 김대건신부 순교 165주년
   
 

▲ 한국 최초의 천주교 사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 충남 당진 우강면에 조성된 솔뫼성지. 성경책을 들고

우뚝 서있는 순교자 동상 뒷편에는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서 뛰어놀았던 어린시절 김대건은

25살의 순교를 상상이나 했을까. 허만진 기자 hmj1985@cctoday.co.kr

 
 

충남 당진의 솔뫼성지, 드넓은 평원에 사시사철 솔바람이 부는 언덕이다. 대숲과 송림이 우거진 언덕에 오르

면 멀리 삽교천까지 볼 수 있는 곳. 빽빽하게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사이에 한 사람의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는 이 동상은 한국 최초의 신부 '피의

순교자' 성(星) 김대건 안드레아다.

지난 5일은 한국 천주교 내 큰 행사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대축일이었다.

◆한국 천주교의 출발지, 솔뫼

솔뫼성지는 김 신부가 태어난 곳이자 일가 4대가 머물렀던 곳이다. 부끄럽게도 이곳의 성지화는 외국인 신부

에 의해 먼저 이뤄졌다. 1906년 합덕본당(현재의 합덕성당)의 외국인 신부가 지금의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

했다.

1945년, 또 다른 외국인 신부가 솔뫼에 '김대건 신부 복자비(福者碑·일반 교인들이 공경할만한 대상이 됨)'를

설립했다. 이로써 김 신부는 준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84년 방한한 교황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으로

추대됐다.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솔뫼성지를 가꾸기 시작한 것은 1946년부터다. 대전교구가 순교 100주년 기념비를

세우면서 성지조성이 본격화 됐다. 이어 대전교구는 1973년부터 솔뫼 성역화 사업을 계획적으로 시작, 1982

년에는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해 솔뫼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

다.

2004년에는 김 신부의 생가가 복원됐다. 생가는 65㎡(약 19.8평)로 대청마루와 안방, 건넛방과 부엌으로 구성

돼 있다.

2005년에는 4만 4743㎡의 기념관과 성당이 건립됐다. 기념관의 타원형 외관은 바다 위에 배가 떠 있는 형상

으로 김 신부가 중국에서 입국할 때 탔던 '라파엘호'의 모양에서 따왔다. 건물을 둘러싼 외벽은 김 신부가

자주 왕래하던 서해를 상징한다. 또한 외벽은 바깥 공기와 만나면 적갈색으로 변화하는 강판을 사용해 순교

자의 피를 형상화했다. 사다리꼴 모양의 건물 입구도 재미있다. 사다리꼴의 특성상 위로 갈수록 문이 좁아

지는데, 이것은 천국의 문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건물은 지상2층으로 성당과 전시관이 마주본다. 성당은 250명이 한 번에 미사를 볼 수 있다. 제대(신부가

미사를 진행하는 곳)의 오른편에는 김 신부의 초상화를 배치해 마치 그가 직접 미사를 참관하는 듯한 효과를

낸다.

전시관은 한국 천주교와 김 신부의 기록물로 꾸며져 있다. 입구에는 김 신부의 연대별 흉상이 늘어서 있는데

그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1999년부터 2001년까지 명동성당에서 제작한 흉상이다. 가톨릭대 해부학교실

팀이 이 흉상을 복원했다. 김 신부의 얼굴 뼛조각을 토대로 19세기 남성의 얼굴 윤곽에 맞춘 청동 모형이다.

이 외에도 연대별로 흉상이 마련돼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흉상을 지나치면 천주교의 4대 박해에 대한 아픈 역사와 만날 수 있다.

정약용 등 진보적 사상가 400여 명이 유배되고 100여 명이 참수 당했던 신유박해(1801), 천주교 박해를 권력

쟁취에 이용한 기해박해(1839), 김 신부 등 9명이 처형된 병오박해(1846). 프랑스인 선교사 9명과 양민 8000여

명을 처형한 병인박해(1866)가 그것이다. 특히 병인박해는 프랑스에 알려져 프랑스 해군이 강화도로 침입

(병인양요)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전시관은 1960년대 대전교구의 주보, 김 신부의 라틴어

서한문 등을 전시하고 있다.

◆순교로 매듭진 삶

한국 천주교 신자들이 이곳을 제일의 성지로 꼽는 이유는 단연 한국 최초의 신부 김대건 신부 때문이다. 그는

1821년 태어나 1846년 만 25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그는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용인 한덕동으로 거처를

옮긴 일곱 살까지 이곳 솔뫼성지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가 성인으로 추앙받는 이유는 종교를 향한 굳건한 신념과 그의 집안 내력 때문이다. 그의 집안은 증조부

이래 4대에 걸쳐 입교해 32년간 10명의 순교자를 냈다. 그중 자신과 아버지, 당고모 3명은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김 신부는 생전에 총 31통의 서한을 작성했다. 그 중 9통이 압수돼 수취인에게 전달 된 것은 22통에 불과하다.

조선인 최초의 서양 유학생이었던 김 신부는 라틴어와 불어 등에 능통했다.

그래서인지 22통의 서한 중 1844년 '훈춘 여행기'와 1846년 옥중에서 작성한 '마지막 회유문'을 제외하곤

모두 라틴어로 쓰여 있다.

이 라틴어 서한문들에는 유쾌하지는 않지만 김 신부의 지기를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1846년 6월 20일,

그는 천주교인이라는 사실이 관가에 발각, 좌포청(左捕廳)에서 심문을 받고 있었다.

판관과 형리들이 심문도중 라틴어 서한문의 내용을 추궁했다. 서한의 내용은 스승인 페레올 주교와 포교에

관해 이야기 한 것이었다. 관리들은 필체가 다른 것을 추궁하자 김 신부는 "철필(鐵筆·PEN)을 가져다주면

한 사람이 다른 글씨체를 쓰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철필이 있을 리 만무했다. 대신 누군가 새 깃을 가져왔다. 김 신부는 뾰족하게 깎아 가는

글씨를 쓴 다음 끝을 뭉뚝하게 잘라 굵은 글씨를 보였다. 두 글씨의 모습이 다르자 관리들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었다.

그 무렵 박해의 주역이었던 풍양조씨(豊壤趙氏)의 세도가 몰락했다. 이와 맞물려 김 신부가 외국어에 능통

하다는 사실도 조정에 알려졌다. 그는 조정의 명을 받아 옥중에서 세계지도와 지리서 등을 번역했다. 이 때

까지는 삶의 희망이 보이는 듯싶었다. 그러나 곧 프랑스가 군함을 파견해 기인박해때 자국의 신부 7명을

죽인 일에 항의, 관리들 사이에 다시 천주교인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결국 김 신부는 그해 9월

16일 한강 새남터에서 참수 당하고 말았다. 그가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은지 1년 1개월이 되던 때다.

올해는 김 신부의 탄생 190주년, 순교 165주년이 되는 해다.

김 신부가 솔뫼에서 뛰놀던 시절에 다가올 순교의 운명을 예감이나 했을까. 그의 스물다섯 해의 삶을 잠시

나마 엿보며 나의 삶을 반성한다. 오늘 우리에게 순교의 의미는 무엇이며, 그 길의 끝은 어디인가. 길 위로

점점이 흩뿌려진 순교의 피 흘린 자취는 은하수처럼 멀고도 아련하기만 하다. 

                                   충청투데이        솔뫼성지(당진)=이형규 기자 knife4026@cc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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