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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간판에 갇힌 사회

by 많은이용 2014. 2. 10.

간판에 갇힌 사회

 

루이 뷔통은 열네 살 때 고향을 떠나 400㎞ 이상 떨어진 파리로 무작정 상경했다. 도중에 품을 팔아 끼니를 해결하면서 파리에 도착하는 데 1년이 걸렸다. 가방 가게를 찾아가 부유층을 위해 여행 짐가방 싸는 일을 대행해주고 입에 풀칠을 했다. 그런데 그가 가방을 깔끔하게 잘 싼다는 소문이 나자 급기야 나폴레옹 3세 황실의 짐 포장 담당으로 발탁됐고, 후에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덮개가 평평한 여행용 가방을 만들어 대히트를 치면서 거대한 패션 왕국을 구축했다. 그를 명품 업계의 선구자로 만든 것은 도전 정신과 열정, 창의성이었다.

나이로 루이 뷔통의 증손자뻘인 살바토레 페라가모는 아홉 살 때 누나를 위해 가죽신을 만들었다. 누나가 초라한 나막신을 신고 교회에 갔다가 놀림감이 되는 것을 보고는 구두 수선점에서 자투리 가죽을 얻어 근사한 가죽 신발을 만들어주었다. 낮에는 구두를 만들고 밤에는 발의 인체 공학을 연구하는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그는 명품 페라가모 왕국을 만들었다. '파리 모드계의 교황(敎皇)'으로 불린 크리스토발 발렌시아가와 마돈나의 콘 브라 의상으로 유명한 장 폴 고티에는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지만 열정과 독창성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됐다.

이런 현상은 외국 패션 업계에 국한되지 않는다.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는 한문 서당과 소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지만 끊임없는 도전 정신으로 대기업을 일구었고, 한국 원양어업의 선구자인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은 서울대 장학생으로 선발됐지만 수산업에 심취해 부산수산대학을 택했다. 그들은 가난했지만 도전과 꿈이 있었다.

지금의 한국 교육은 도전 정신과 창의성을 죽이는 교육이다. 학교와 학원을 죽어라고 오가며 겨우 대학에 들어가면 또다시 취업 수험생이 된다. 한국의 대학 진학률(71.3%)은 스위스와 독일의 2배다. 고졸로는 취업이 거의 불가능한 데다 '고졸자'라고 헐뜯는 소리를 듣기가 두렵기 때문에 기를 쓰고 대학 문을 두드린다.

삼성이 얼마 전 각 대학에 추천 인원을 할당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계획을 철회했다. 추천 인원을 차등 할당한 사실이 알려지면 평등 의식이 과잉된 한국에선 비난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과한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삼성은 방식을 바꿔서라도 그 계획과 취지를 계속 추구해야 한다. 대학 서열과 지역 장벽을 뛰어넘어 기업 발전에 필요한 실력 있는 인재를 과감히 채용하고, 우수한 고졸자도 파격적으로 선발해야 한다. 삼성은 국내 대기업 중 지방대 출신 임원이 가장 많은 기업이다. 그들이 지금의 삼성을 만드는 데 기여했으니 지방대 출신 우수 인재의 경쟁력은 입증됐다.

광복 이후 대입 제도가 수십 차례 바뀌었는데도 학생들이 여전히 입시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은 교육 문제가 제도 개편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기업들이 끊어볼 순 없을까. 명문대 실업자 앞에 '지잡대(지방대의 비칭)' 취업자가, 대졸 실업자 앞에 고졸 취업자가 가슴을 내밀 수 있는 사회가 되면 감옥 같은 우리 교육 현실에도 금이 가지 않겠는가.   
 
                        여시동         조선일보 프리미엄뉴스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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