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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교육

남북한 架橋 역할을 할 탈북자

by 많은이용 2014. 6. 18.

남북한 架橋 역할을 할 탈북자

 

종이 발명 이전에는 동물의 가죽인 양피지(羊皮紙)에 글을 적었다. 가죽이 귀하다 보니 가치가 없어진 내용은 긁어내고 그 위에 필사(筆寫)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재활용 양피지를 '팰림프세스트(palimpsest)'라고 한다. 목욕탕에서 부력(浮力)을 발견하고 유레카를 외친 것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아르키메데스가 쓴 주옥같은 논문에도 중세 기도서가 덧쓰이게 된다. 다행히 한 문헌학자가 기도서 뒤에 미세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글자를 해독해 아르키메데스의 논문을 극적으로 복원해냈다.

인간의 삶에서도 기존 것을 무효화하고 새로 설정하는 팰림프세스트가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가장 강한 경험을 하는 이가 탈북자 아닐까 싶다. 북한의 경험과 기억을 폐기하고 남한의 것을 다시 새긴다는 측면에서 그렇다.

탈북 학생의 학습을 지원하기 위해 개발·보급하는 맞춤 교재 집필에 참여하면서 접하게 된 북한 교과서는 충격적이었다. 수학 교과서에 실린 문제조차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삼각비를 이용해 수평거리를 구하는 문제는 '영웅적 조선인민군의 해안 방어 진지에서는 철천지 원쑤 미제의 간첩선을 단발에 격침시켰다'는 상황 설명으로 시작한다. 이런 교과서에 익숙한 탈북 학생이 실생활의 말랑말랑한 소재가 주를 이루는 남한 교과서로 배우게 될 때 괴리감은 상당할 것이다.

탈북자 대안학교 교사가 들려준 이야기도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검정고시에 대비하느라 OMR 카드를 나눠주고 표기 연습을 시켰더니 학생이 'O형은 없는데요'라고 질문했다. 그 학생은 난생처음 혈액 검사를 해 자신의 혈액형을 알게 됐는데 문제지가 A형인지 B형인지 표시하는 난을 혈액형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북한 주민 대부분이 혈액형을 알지 못하고, 북한의 거의 모든 시험 문제가 서술형과 단답형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한국에 입국해 생소한 환경에 던져진 탈북 학생은 여러 국면에서 어려움을 감내해야 한다. 북한을 탈출한 후 제3국 장기 체류를 거쳐 입국하다 보니 학습 공백이 길어져 기초학력이 부진하고 중도 탈락 비율도 높다. 또 동급생과 나이 차이 때문에 또래 관계를 형성하기 어렵고 심각한 차별 의식 속에 왕따 문제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이런 부적응과 심리적 위축감에 시달리는 탈북 학생은 북한 출신이라는 주홍글씨를 감추기 위해 철·광·옥·금같이 광물이 들어가는 북한식 이름을 세련된 뉘앙스로 개명하기도 한다.

올해 초 박근혜 대통령의 '통일 대박' 발언 이후 통일 논의가 봇물을 이뤘다. 드레스덴 선언 같은 거대 담론도 중요하지만 통일 이후 남북 통합의 시금석이 되는 탈북자에 대한 진정성 있는 배려가 필요하다. 탈북자를 결핍 상태로 규정하지 않고 남북한의 가교(架橋) 역할을 할 주체로 보는 인식의 전환, 탈북자에 대한 편견을 불식하고 그들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작은 실천부터 시작해야 한다.

팰림프세스트에서 기도서 뒤에 묻힌 논문을 읽어내는 데는 첨단 기술이 동원되었지만 탈북자 이면에 새겨진 북한 이력을 받아들이는 데는 특별한 기술이 필요 없다. 탈북자를 대등한 파트너로 인정하는 열린 마음과 따뜻한 가슴이면 충분하다.

                                                                 박경미 | 홍익대 수학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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