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 빛을 남겼다면…"
조선일보 김윤덕 문화부 차장
신장 종양 선고를 받은 아홉 살 아들의 손을 잡고 병원 문을 나선 내외(內外)는 천 근 쇳덩이가 가슴을 눌러 숨 쉬기도 어려웠다. 치료 방법이 없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는 시골서 보지 못한 높은 건물과 자동차의 홍수가 신기하고 재미난 모양이었다. 구두 가게 앞에서 "아빠, 구두" 하길래 낡은 운동화를 벗기고 가죽신 한 켤레를 사서 신겼다. 아이의 두 눈은 천하를 얻은 듯한 기쁨으로 빛났다. 그 얼굴을 차마 슬픈 눈으로 볼 수가 없어 아빠는 마주 보며 웃어주었다.
▶막내아들을 불치의 병으로 떠나 보낸 수필가 유달영 선생 이야기다. '슬픔에 관하여'라는 자전 수필에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오늘, 의사의 선고를 듣고 천 길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는 슬픔을 주체할 수 없으니, 이는 천붕보다 더한 것'이라고 썼다.
▶권찬주 여사는 3·15 부정선거 시위에 참여했다 행방불명된 아들 김주열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마주했다. 그는 "나는 사체를 못 받겠으니, 부정선거로 당선된 사람에게 갖다 주시오!"라며 오열했다. 그러나 한 달여 뒤 그는 전국의 어머니들, 특히 4·19 혁명 때 희생된 학생의 어머니들을 위로하는 '편지'를 띄웠다. '죽어 빛을 남겼다면 우리 모두 뜨거운 눈물을 거둡시다. 자식들이 뿌린 따뜻한 선혈이 남긴 이 민족의 넋이 헛되지 않도록 내일의 새로운 세대를 뒷받침하는 이 나라의 어머니로서 다시 옷깃을 여밉시다.'
▶백인 경관에게 사살된 흑인 청년 마이클 브라운의 장례식장에서 부모는 슬픔을 용서와 화해로 승화시켰다. 사건 발생 직후 미국 미주리주 퍼거슨시가 시위와 약탈로 혼돈 상태에 빠져들자 아버지는 "제발 멈춰라.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뿐" "폭력으로 내 아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어머니는 "내가 한 모든 일 중 가장 잘한 것은 너를 낳은 것"이라고 작별 인사를 고했다.
▶자식의 억울한 죽음 앞에 분노하지 않을 사람 있을까.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회 한성식 부위원장은 "아직도 건드리면 터질 듯한 슬픔과 분노에 잠겨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수사권, 기소권 우리도 받고 싶다. 그러나 우리를 걱정하고 위로해준 국민들 생계를 위협해가며 우리 주장만 하는 건 고인들 죽음을 헛되게 할 뿐"이라고 했다. 유달영은 이렇게 썼다. '인간의 고귀한 것은 한결같이 슬픔 속에서 생산된다. 신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를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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