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의 바람은 변방에서
처음으로 선생님을 모셨다. 8개월 만이다. 교사도 강사도 발제자도 없는 '거꾸로 교실'이지만 예외를 두었다. 공부 재료는 책이나 인터넷에 충분히 있지만, 빅히스토리 그 자체의 역사와 다른 사람들이 빅히스토리를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었다. 과학도시 대전이라지만 빅히스토리에 관해서라면 도룡동은 변방일 뿐이다.
빅히스토리를 공부하다 보니 내용뿐만 아니라 주체에 대해서도 호기심도 생겼다. 1년 동안 매주 만나서 공부해도 빠듯할 정도로 방대한 내용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있는지, 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빅히스토리 강의가 처음 개설되었던 호주나 1500개의 학교에서 가르친다는 미국은 상황이 어떤지 궁금했다.
그래서 '조지형 빅히스토리 협동조합' 김서형 박사를 모셨다. 원래 집이 대전이라고 했다. 도룡동에서 빅히스토리를 공부하는 모임이 8개월 동안 이어졌다고 하니 흔쾌히 서울에서 내려오셨다. 빅히스토리 교육과 보급에 힘을 쓰고 있는 김서형 박사도 우리가 궁금했을 것이다.
우리 교실은 두 가지 이유로 선생을 두지 않는다. 첫째는 구할 수가 없어서였고, 둘째는 필요가 없어서다. 매주 금요일 저녁 3시간씩 1년 동안 가르치겠다고 나서는 선생이 어디 있을 것이며, 매주 강사를 섭외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학생으로만 교실을 채웠다.
강의식 공부를 탈피해야 한다는 생각도 있었다. 강의를 들을 때는 아는 것 같지만 몇 가지 인상을 제외하면 대부분 잊어버린다. 유태인들은 탈무드를 공부할 때 짝을 지어 대화를 나눈다. '하부르타'라는 토론식 공부법이다. 유태인 종합대학교 예시바 대학 도서관은 마치 호프집처럼 시끄럽다. 떠들며 공부하는 도서관 풍경이 낯설었다.
EBS 다큐프라임 '왜 우리는 대학에 가는가' 5부에 재미있는 실험이 나온다. 개인 독서실에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그룹과 다른 사람과 짝을 이뤄 말하면서 공부하는 그룹을 비교했다. 역사책에 있는 내용을 3시간 동안 공부한 뒤 객관식, 주관식, 서술형 시험을 보게 했다. '말하는 공부' 그룹이 모든 형태의 문항에서 더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강의를 들으면 5% 정도가 기억에 남고, 서로 설명하면 90% 정도가 남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말하는 공부'가 '듣는 공부'보다 효과적이다. 말문을 터야 한다.
생각을 말로 표현하고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다 보면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명확해진다. 말로 정리하면서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질문을 만났을 때 다른 아이디어와 결합하기도 한다. 가르치는 것이 최고의 공부이고, 선생이 최고의 학생이다. '거꾸로 교실'에서 선생이 빠진 자리는 학생들이 채운다.
보통은 강의가 끝나면 질의응답이 이어진다. 학생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면 선생이 대답한다. 대개 질문은 짧고 대답은 길다. 하지만 '거꾸로 교실'은 '말하는 공부방'이 되어야 했기에 다른 프로세스를 따랐다. 학생들이 각자 의견과 질문을 포스트잇에 정리하고, 4명 이하로 모둠을 만들어 이야기를 나눈다. 각 모둠에서 나눈 이야기를 공유하는 시간을 갖고, 누군가는 칠판에 질문 목록을 정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학생들 모두 '말하는 공부'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선생은 학생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마지막에 질문 목록을 빠르게 훑어주기만 하면 된다.
김서형 박사의 강의를 들으면서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빅히스토리 교육의 문제의식과 지향점을 공유하고 있었고, 현대에 새롭게 쓰여지고 있는 우주의 대서사시를 받아들이는 세계관도 일치함을 느꼈다. 변방의 모임이라고 무시하지 말자. 역사를 보건대, 변화의 바람은 변방에서 불어오지 않았던가.
(출처 : 대전일보 2017. 2. 16. 22면 이정원의 문화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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