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더 전해야 하는데… " 마지막 설교
"제 이름과 아빠, 엄마, 가족 그리고 친구들 이름과 소망을 적은 거예요."
지난달 24일 오전 독일 아이슬레벤(Eisleben)의 성(聖) 베드로·바울 교회 곳곳에는 아이들이 고사리손으로 적은 종이쪽지가 놓여 있었다. 이 교회는 루터(1483~1546)가 유아세례를 받은 곳. 교회 내부는 새로 단장돼 있었다. 세례반(盤)엔 아이들이 얹어놓은 아기 인형이 놓였고, 주변엔 소망을 적은 천 조각이 덮였다. 인솔 교사 요하나 슈스턴씨는 "학생들과 함께 루터의 세례 교회를 찾아 오늘날 세례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고 했다. 학생들은 "매주 교회에 나오진 않는다"고 했다. 최근 유럽 교회의 신자 감소 현상이 두드러지만 현지에서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종교성을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아이슬레벤은 마르틴 루터가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곳이다. 루터 63년 인생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루터는 아버지의 희망에 따라 학업을 위해 10대 중반에 고향을 떠났지만 고향과의 관계는 꾸준히 유지했다. 루터의 마지막 고향 방문은 사망 한 달 전이었다. 루터는 1546년 1월 23일 세 아들과 함께 비텐베르크를 출발해 고향으로 향한다. 이 지역 만스펠트 백작의 영토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닷새 만에 고향에 도착한 루터는 2월 15일 시내 중심의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서 마태복음 11장을 본문으로 마지막 설교를 한다. 약 30여분간 설교를 이어가던 루터는 "이 복음에 관해 훨씬 더 많은 말을 해야겠지만, 내가 너무도 연약하여 여기서 이만 맺고자 한다"며 설교를 마쳤다. 사흘 후 성 안드레아스 교회가 창문으로 내다보이는 방에서 영면했다.
아이슬레벤은 도시 전체가 루터 박물관 같았다. 생가(生家)와 숨을 거둔 집이 박물관으로 개방되는 것은 물론 거리 건물 벽면에 루터와 종교개혁가들의 얼굴을 벽화로 그려놓은 곳이 수두룩했다. 심장과 십자가, 장미로 구성된 루터의 문장(紋章) 역시 도로와 중앙 광장 바닥 그리고 성 베드로·바울 교회 천장 곳곳에 새겨져 있었다. 특히 중앙 광장에 서 있는 루터의 동상은 여타 도시와 다른 포즈였다. 대부분 도시의 루터 동상이 왼손에 자신이 번역한 성경을 들고 있는 모습인데 반해, 아이슬레벤의 동상은 오른손에 레오 10세 교황이 보낸 파문 칙서를 구겨서 들고 있는 게 독특했다. 레오 10세 교황은 애당초 루터가 '95개 논제'를 제기했을 때만 해도 사태를 대수로이 여기지 않았다. "루터는 술 취한 독일인이다. 술 깨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루터가 치켜든 횃불은 확산했고, 교황은 말을 바꿨다. "주님의 포도밭에 뛰어든 멧돼지다."
교황의 표현처럼 루터는 저돌적(猪突的)으로 번역하고, 저술하고, 설교했다. 마침 보급되던 금속활자 인쇄술은 종교개혁의 날개가 됐다. 1500년부터 1540년까지 독일에서 나온 책의 3분의 1이 루터의 저서였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설교는 루터의 또 다른 무기였다. 그가 평생 한 설교 중 현재까지 남은 것은 2300편에 이르며, 특히 1528년에는 145일 동안 195번까지 설교한 기록도 있다.
지난주 루터 종교개혁 유적을 순례한 기독교한국루터회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사업국장 원종호 목사는 "흔히 유럽에선 개신교가 쇠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에게 개신교는 삶과 문화에 녹아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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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6/09/20170609001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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