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은 지배자가 아닌 조력자나 후견인(後見人,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스승이 앞장서서 갈 길을 정해주고 '너는 따라오기만 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럴 때 어느 길로 갈지, 목적지가 어디가 될지, 장애물들을 어떻게 넘을지를 모색하고 판단하는 것은 스승이다. 나아가 길을 가는데 필요한 일들을 제자에게 시킨다면? 조력자는 스승이 아니라 제자가 된다. 그것은 제자를 성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무기력하게 만든다.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들어놓고, 많은 스승들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여기까지 너를 데리고 왔으니, 이제부터는 너 혼자 가봐라" 한 번도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 본 적 없는 제자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스승의 눈치를 보며 위태롭게 몇 걸음 옮긴다 해도, 이내 넘어지고 말 것이다. 그럴 때 스승이 "이제까지 무엇을 배웠단 말이냐? 그러기에 정신 차리고 잘 배워야지!"하고 다그친다면? 스승이 자신의 말못을 제자에게 덮어씌우는 꼴이다.
오늘날에는 이처럼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학생들이 매우 많다. 학생들은 도무지 궁금한 것이 없다. 궁금한 것이 없으니 질문도 없다. 지적 탐구에 대한 열정은 커녕 자신의 머리를 쓰는 것 자체를 어색해한다. 교사 없이 '혼자서 공부해보라' 하면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해야 할 지를 모르는 학생들이 수두룩하다. 오늘날 교사들이 교실에서 하는 일은 원맨쇼에 가깝다. 혼자 질문하고 혼자 대답한다. 학생들은 그것을 구경할 뿐이다. 수동적인 위치에 놓여있는 한, 학생들의 지적 무기력은 필연적이다.
교실 현장에서 머리를 쓰는 것은 과연 학생일까, 교사일까? 교사이다.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설명해나가는 사람은 교사이다, 그러므로 교사가 머리를 쓴다. 물론 열심히 수업을 받는 학생들은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머리를 쓸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교사만큼은 아니다. 학생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교사도 아주 많이 머리를 쓴다고 할 수는 없다. 교사들은 매년 똑같은 내용을 가르치는 까닭에 관성적으로 강의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방적인 강의는 학생과 교사 모두를 소외시킨다. 그것은 학생들의 지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고, 교사에게도 지적 자극이 되지 않는다. 좋은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모두를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일방적인 강의는 그런 면에서 효과가 매우 낮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교육'하면 강의 듣는 것을 떠올린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은 다른 방식의 교육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박민영(문학평론가) 교육과 사색-2014.5월호 중에서
'교육'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상’ 복지에 학교안전 무너질 판 (0) | 2014.05.22 |
---|---|
<김형태의 노변한담> 아이들의 기발한 생각 (0) | 2014.05.21 |
인재의 정의 3C (0) | 2014.05.20 |
문제아 (0) | 2014.05.08 |
'直線'은 '曲線'을 이길 수 없다 (0) | 2014.05.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