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와 시간
고향에 가면 어스름 저녁 무렵 마실을 나가곤 했다. 남녘 항구도시 옛 도심 중앙통까지 천천히 걸어갔다 오는 산책 길이다. 그때마다 신기했다. 어릴 적 높고 크던 초등학교 정문 계단이 어찌 이리도 아담한지. '오사카(大坂)'라 불렀던 가파른 찻길에서 극장 골목으로 올라서는 계단은 또 어찌 그리 보잘것없는지. 어른이 돼 키와 보폭이 커진 탓이라고만 하기엔 모든 것이 너무 작고 짧다. 나이 들면서 시각 기억이 왜곡되는 현상이다.
▶시간 기억도 비슷하다. 코흘리개 땐 반나절도 영원히 끝나지 않을 듯 길었다. 이젠 몇 년도 반나절인 양 지나간다.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대사처럼. "지금까진 내가 시간을 함부로 썼는데 이제 시간이 나를 함부로 대하네." 19세기 프랑스 철학자 폴 자네는 "삶의 길이에 대한 느낌은 살아온 세월과 반비례한다"고 했다. 열 살 아이는 1년을 인생의 10분의 1로, 예순 살 사내는 60분의 1로 여긴다고 했다. 10대 때 시속 10㎞로 가던 세월이 60대엔 시속 60㎞로 간다는 요즘 넋두리와 닮았다.
▶나이를 먹어 SCN 세포와 도파민이 줄어들면 SCN 회로가 느리게 진동한다. 그렇게 몸 안 시계가 느려지면 상대적으로 바깥세상이 빨리 돌아가는 것으로 인식한다. 거꾸로 도파민이 많으면 세상은 느리게 움직인다. 도파민은 즐겁고 행복할수록, 새롭고 자극적인 경험을 할수록 많이 분비된다. 어린 시절엔 모든 게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다. 남은 기억도 촘촘하게 많아 세월이 길 수밖에 없다.
▶늙으면 어제도 오늘도 비슷한 일상, 단조로운 삶이 이어진다. 그러니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간다. 새해 새 마음으로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또 다른 새해가 코앞에 왔다. 시간을 도둑질당한 것 같다. 그만큼 타성에 젖어 살았다는 얘기다. 시간을 서투르게 쓰는 이가 시간이 짧다고 불평한다. 남은 세월을 선물이라 여기고 도파민이 샘솟도록 살아보자.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고은 '그 꽃'). 깨달음은 한 해라는 산에 오를 때가 아니라 한 해의 마루턱을 내려올 때 얻는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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