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심문받았던 자리엔… 종교개혁 큰 걸음의 '신발'이
'교황은 어떠한 죄책도 용서할 수 없다. 자신의 판단 영역에 속한 사건들만 사할 수 있을 뿐이다.'
1517년 10월 31일 수도사 마르틴 루터는 독일 북부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문에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였다. 권위와 인습에 사로잡힌 중세에서 벗어나 서구의 근대를 여는 첫걸음이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루터의 자취를 찾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되짚어 본다.
작은 도시를 조금 헤맸다. "글쎄, 이 근처인데…. 미안, 잘 모르겠어요." 강아지 데리고 산책 나온 시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독일 남서부 보름스(Worms). 인구 8만5000명 작은 도시다. 마을 동쪽으로 라인강이 흐른다. 지난 8일 오후 구름 낀 하늘은 금세라도 비를 뿌릴 듯했다.
1521년 4월 18일 오후 6시 서른여덟 살 수도사 마르틴 루터(1483~1546)는 이곳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고위 관리들 앞에 섰다. 보름스 대성당(성 페터 돔) 옆 주교궁(宮)에서 열린 제국회의였다. 보름스는 이전에도 군사·재정 문제를 논의하는 제국회의가 열리던 곳이다. 이번에는 다른 주제였다. 회의 탁자에는 루터가 쓴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3년여 전인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 교회에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인 이후 쓴 책들이다. 이 기간 '로마 교황의 지위' '그리스도인의 자유'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 같은 팸플릿 책자를 여럿 냈다. 모두 교황과 로마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몇 달 전 교황(레오 10세)이 보낸 파문 경고 교서를 불태워 이미 수도사 지위를 박탈당한 상태였다.
루터가 심문받은 곳은 지금 잔디 깔린 공원이다. 현지 주민들도 장소를 잘 알지 못했다. 당시 건물은 17세기 프랑스군 공격에 파괴됐다 한다. 대성당은 보수 공사 중이다. 일부 벽면은 흰 천막에 덮여 있다. 환하게 웃는 프란치스코 교황 얼굴 사진이 천막 위에 걸려 있었다. 대성당 광장 오른편 철문 안쪽이 루터가 심문받던 자리다. 기념 조형물이 서 있다. 제국회의 450주년을 기념해 1971년 세운 청동 조형물이다. 주교궁 건물에 번개가 치는 모습을 나타냈다. 지역 로터리클럽은 올해 종교개혁 500년을 맞아 이 조형물 앞에 신발 모양 조형물을 더했다. '루터의 신발'이라 이름했다. 종교개혁의 큰 발걸음을 내디딘 곳이란 뜻을 담았다.
루터는 이곳에서 16~18일 사흘간 심문을 받았다. 4월 17일 오후 4시 열린 심문에서 최종 답변을 하루 늦춰달라고 요청했다. 심문을 맡은 요한 에크 대주교의 질문은 두 가지였다. 이 책들을 썼는가? 주장을 철회하는가?
"어제 저것들을 부정하느냐고 물으셨지요? 모두 제 것입니다. 제 주장이 분열을 일으킨다 하셨지요? '화평이 아니라 검(劍)을 주러 왔다'는 주님의 말씀으로 답변을 대신합니다."
루터는 이 자리에서 유명한 연설을 남긴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습니다.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 아멘." 연설 원문에는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저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한다. 교회사(史) 학자인 롤런드 베인턴 예일대 교수는 1978년 'Here I Stand(여기 내가 서 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루터 평전을 쓰기도 했다.
황제 카를 5세는 루터를 '법외자(法外者)'로 선언했다. 누구든 루터에게 위해(危害)를 가하더라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황제는 5월 6일 '보름스 칙령'에 서명했다. "루터를 이단으로 확정한다. 그에게 4월 15일부터 21일간의 여유를 주었다. 시간이 되면 그를 환대해서는 안 된다. 그를 따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이다. 그의 책들은 인간의 기억에서 말끔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보름스는 이제 황제가 아니라 루터를 기억하고 있다. 루터가 심문받은 곳 거리 이름은 '루터링(Lutherring)'이다. 인근에는 '루터 광장(Luther Platz)'이 있다. 광장 가운데에는 루터 동상이 서 있다. 1868년 세운 것이다. 당시 프로이센 군주이자 훗날 독일 황제가 되는 빌헬름 1세가 제막식에 참석했다. 루터를 비롯해 여러 인물 동상을 함께 세워 종교개혁 과정을 나타냈다.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루터 동상이 서 있다. 발 아래에 "나는 달리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 이 몸을 도우소서"라는 루터의 말이 새겨져 있다. 루터 동상 아래에는 종교개혁의 선구자 동상 넷이 동·서·남·북 방향으로 앉아 있다. 왼쪽부터 사보나롤라, 얀 후스, 위클리프, 발데스 동상이다. 바깥 둘레에는 루터를 후원했던 프리드리히 선제후, 종교개혁 동지인 멜란히톤 동상 등이 서 있다.
보름스에서 루터 심문이 열린다는 소식에 독일 민중 1만4000여 명이 몰려들었다. 그때 보름스 인구는 7000명이었다. 로마 교황에 맞선 독일인 루터의 용기에 민심(民心)이 꿈틀거린 것이다. 루터는 제국회의에서 먼저 독일어로 연설했다. 라틴어로 말하라는 명령을 받고서 자신의 주장을 라틴어로 다시 펼쳤다. 그리고 승리자처럼 두 팔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민중 소망에 잎 피운 說話 속 '루터 나무'
보름스 취재 중 '루터바움 스트라세' 즉 '루터 나무 거리'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지도 앱에 'Lutherbaum Strasse'를 입력했다. 루터 광장에서 2.2㎞ 떨어져 있다 한다. 렌터카를 몰아 도착한 곳은 2층 주택이 늘어선 한적한 마을이다. 오랜 세월의 흔적이 남은 굵은 나뭇등걸이 보였다. 썩어 사라진 나무줄기 일부를 철판으로 덧댔다. 안을 들여다보니 가는 나무가 새로 자라 푸른 잎을 피웠 다.
루터를 심판하는 보름스 제국회의가 열렸을 때 동네 할머니 둘이 논쟁을 벌였다. 한 할머니가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루터 주장이 옳다면 여기에서 잎이 솟을 것이라 했다 한다. 그 지팡이가 나무가 되었다는 것. 믿기 어려운 설화(說話)지만 종교개혁에 희망을 품었던 당시 민중의 소망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덧댄 철판에는 두 할머니가 논쟁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 Copyright ⓒ 조선일보 2017. 5. 27. 게재
자료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6/201705260008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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