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門에 붙인 '95개 논제', 잠든 유럽을 깨우다
[종교개혁 500년,루터의 길을 가다] [2] 비텐베르크
'면죄부 판매' 교황 비판하며 종교개혁의 시작 알려
루터가 후반 35년 보낸 도시
수도원은 전시관으로 변신… 城 교회 안에는 그의 묘 있어
온통 '루터'로 가득했다. 시내 안내판에 적힌 도시 이름은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 1938년부터 쓰고 있는 공식 지명이다.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라는 뜻. 베를린 남쪽 100㎞ 떨어진 인구 5만명의 작은 도시다. 루터의 얼굴 윤곽 로고가 도시 이름 앞에 그려져 있었다. 옛 도심 시청 광장에는 루터 동상이 서 있다. 인근 상점에서는 루터 모습을 인쇄한 포스터, 티셔츠, 컵 같은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63년 생애 중 후반 35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곳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성서학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을 여기서 시작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대문에 면죄부(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였다. 공개 논쟁을 요구하는 당시 관례였다 한다. 이 일이 종교개혁의 첫걸음이 되리라고는 자신도 처음엔 생각지 못했다. 인쇄·출판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을 때였다. 업자들은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해 곳곳으로 실어날랐다.
마르틴 루터(1483~1546)는 63년 생애 중 후반 35년을 이곳에서 보냈다. 이곳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성서학을 가르쳤다. 종교개혁을 여기서 시작했다.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성(城) 교회 대문에 면죄부(면벌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 논제'를 붙였다. 공개 논쟁을 요구하는 당시 관례였다 한다. 이 일이 종교개혁의 첫걸음이 되리라고는 자신도 처음엔 생각지 못했다. 인쇄·출판업이 급속히 발전하고 있을 때였다. 업자들은 '95개 논제'를 독일어로 번역해 곳곳으로 실어날랐다.
"교황이 누군가를 연옥에서 구출할 수 있는 권세가 있다면 모조리 다 꺼내고 연옥을 폐쇄하는 것이 사랑의 도리 아닌가? 돈을 받고 숱한 사람을 구원한다는데 거룩한 사랑으로 그곳을 텅 비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로마 교황을 정면으로 공박한 루터의 '논제'는 독일인들에게
성 교회 대문은 이제 '기념물'이 됐다. 아예 '95개 논제'를 새긴 청동 대문을 달았다. 1858년 프로이센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지시했다. 대문 위 그림에도 루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왼쪽에 루터가 성경책을 들고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그의 후배이자 동지였던 멜란히톤(1497~1560)이 그려져 있다. 지난 9일 오후 유럽 관광객들이 청동 대문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원통형 기둥 첨탑이 솟은 성 교회 앞에는 대형 버스가 관광객 수십 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교회는 평일에도 개방 중이었다. '루터의 묘'가 이곳에 있다. 교회 안 열을 지어 있는 긴 의자 앞과 제단(祭壇) 사이 공간 오른쪽에 어른 무릎 높이쯤 되는 묘지석이 있다. '마르틴 루터가 묻혀 있다'는 라틴어 글귀가 적혀 있다. 묘지석 앞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반대편 왼쪽에도 같은 크기 묘지석이 있다. 멜란히톤의 것이다.
성 교회 대문은 이제 '기념물'이 됐다. 아예 '95개 논제'를 새긴 청동 대문을 달았다. 1858년 프로이센 군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지시했다. 대문 위 그림에도 루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 왼쪽에 루터가 성경책을 들고 앉아 있다. 오른쪽에는 그의 후배이자 동지였던 멜란히톤(1497~1560)이 그려져 있다. 지난 9일 오후 유럽 관광객들이 청동 대문 앞에서 연신 사진을 찍었다. 원통형 기둥 첨탑이 솟은 성 교회 앞에는 대형 버스가 관광객 수십 명을 내려놓고 있었다.
교회는 평일에도 개방 중이었다. '루터의 묘'가 이곳에 있다. 교회 안 열을 지어 있는 긴 의자 앞과 제단(祭壇) 사이 공간 오른쪽에 어른 무릎 높이쯤 되는 묘지석이 있다. '마르틴 루터가 묻혀 있다'는 라틴어 글귀가 적혀 있다. 묘지석 앞에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반대편 왼쪽에도 같은 크기 묘지석이 있다. 멜란히톤의 것이다.
시청 광장 루터 동상은 1821년 세운 것이다. 왼쪽엔 멜란히톤 동상이 조금 작은 크기로 서 있다. 시청 광장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들어가면 첨탑 두 개가 우뚝한 '성 마리아 시립 교회'가 있다. 루터가 독일어로 처음 설교했던 곳이다. 루터는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이단 판정을 받은 후 1522년 3월 비텐베르크로 돌아왔다. 평신도도 미사 때 사제만 마시던 포도주를 빵과 함께하는 '양종(兩種) 성찬'을 처음으로 행했다. 교회 밖 영문 설명문에는 '종교개혁의 어머니 교회(The Mother Church of Reformation)'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루터가 소속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지금 박물관 '루터하우스'가 됐다. 루터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1525년 마흔두 살 루터가 결혼했을 때 이곳에서 살도록 했다. 스물여섯 살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공감해 수도원을 탈출한 수녀였다. 둘은 결혼 후 여섯 자녀를 낳는다. 건물 앞 '루터 정원'에는 아내 폰 보라의 등신대 동상이 있다. 바닥 돌을 보수하는 공사 중이어서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루터하우스 전시관에는 당대에 그린 루터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궁정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1528년 작품이다. 2층에는 루터 가족이 살았던 거실이 있다. 방에 놓인 탁자는 루터가 실제 사용하던 것이라 한다. 한글 안내 책자(2유로)가 있어 반가웠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1534년 판본)도 전시 중이다. 루터는 1522년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이어 2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루터 성경'은 당대 베스트셀러였다. 이후 여러 민족어로 성경 번역이 이뤄지게 된다. 덴마크어·핀란드어·슬로베니아어 번역이 이어졌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유럽 여러 민족의 잠자던 의식을 깨운 것이다.
루터가 소속했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은 지금 박물관 '루터하우스'가 됐다. 루터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는 1525년 마흔두 살 루터가 결혼했을 때 이곳에서 살도록 했다. 스물여섯 살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공감해 수도원을 탈출한 수녀였다. 둘은 결혼 후 여섯 자녀를 낳는다. 건물 앞 '루터 정원'에는 아내 폰 보라의 등신대 동상이 있다. 바닥 돌을 보수하는 공사 중이어서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루터하우스 전시관에는 당대에 그린 루터 부부의 초상화가 있다. 프리드리히 선제후의 궁정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의 1528년 작품이다. 2층에는 루터 가족이 살았던 거실이 있다. 방에 놓인 탁자는 루터가 실제 사용하던 것이라 한다. 한글 안내 책자(2유로)가 있어 반가웠다.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1534년 판본)도 전시 중이다. 루터는 1522년 신약성서를 번역하고 이어 2년에 걸쳐 성경 전체를 번역했다. '루터 성경'은 당대 베스트셀러였다. 이후 여러 민족어로 성경 번역이 이뤄지게 된다. 덴마크어·핀란드어·슬로베니아어 번역이 이어졌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이 유럽 여러 민족의 잠자던 의식을 깨운 것이다.
Copyright ⓒ 조선일보 2017. 5. 30. 게재
자료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29/201705290265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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