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빨간약, 경청
혀가 귀를 밀어낸 세상… 안 들으니 못 듣는 '난청 사회'
공감은 듣기에서 시작… 들어주는 게 빨간약이다
냉면 한 그릇 두고 상사가 말했다. 친분이 도탑지 않은 상사였다. 막연히 그와 나의 세상은 질감이 다르리라 여겼다. 그래서, 실은, 점심 사역이라고 생각했다. 냉면 국물처럼 차가워 보였던 그가 던진 말이 뜨끈한 육수로 다가올 줄이야. 꽁꽁 언 마음이 쩍 갈라졌다. 뜬금없이 눈물이 찔끔 새나왔다. 직장 생활에 굳은살 박일 대로 박였다. 사회생활용 보호색 뒤집어쓰는 데 능한 닳고 닳은 직장인이다. 그런데 왜 엉뚱한 곳에서 감정 둑이 무너져 버렸을까. 더 당황한 쪽은 나였다.
사연은 이랬다. '워라밸'의 시대. 밥 자리 대화 주제가 나라 얘기, 회사일로 줌인하더니 육아로 건너뛰었다. "그래, 그간 애는 어떻게 키웠어?" 세상사 거시(巨視)를 다루면서 개인사 미시(微視)를 들여다보는 데엔 미숙한 족속이 기자 아니던가. 예상 트랙을 벗어난 질문에 쭈뼛쭈뼛하다 10여년 전 아등바등 갓난쟁이 키울 때 얘기를 꺼냈다. 한참 듣더니 상대가 말했다. "그랬구나." 그 말이 뭐라고 닫혔던 마음의 문에 탑승교가 놓였다. 웅크리고 있던 민낯의 내가 걸어나왔다.
대기업에 다니는 지인과의 점심 자리에서 이 얘기를 꺼냈다. "맞아, 세상 살며 제일 위로가 되는 말이야.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제스처잖아. 그저 들어주는 게 힘이 되는 거지." "위에서 뭐가 힘드냐고 묻기는 하지. 문제는 다음. 어렵게 얘기 꺼내면 듣는가 싶더니 바로 '근데 있잖아' 하면서 훈계 모드잖아." 회사 생활 20~30년 베테랑들도 공감에 목말라 있었다.
글로벌 헬스케어회사 '박스터'가 매년 전 세계 직원들에게 하는 설문에는 이런 문항이 있다고 한다. "내 직속 상사는 나를 인간적으로 대하는가(My direct manager cares about me as a person)". '인간적으로 대한다'를 가늠하는 잣대가 '잘 듣는가'란다. 윽박지르는 리더십 말고 어루만져 함께 가는 리더십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의 말이 떠올랐다. "공감하려면 '충조평판' 날리지 말라." 충조평판. 충고, 조언, 평가, 판단의 줄임말이다. 한국 사람 전문 분야다. 정 박사는 "사람 마음은 외부에서 이식된 답으로는 정돈되지 않는다. 스스로 찾은 답만이 마음에 스민다. 공감자의 역할은 상대가 자기의 마음을 또렷이 볼 수 있게 '심리적 조망권'을 확보하도록 귀를 여는 것"이라고 했다. 헤겔도 그랬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마음 안쪽에 달려 있다"고. 상대가 스스로 마음 안쪽에 달린 문을 열고 나올 때까지 듣고 기다려 줘야 한다고 했다. 공감은 '듣기'에서 시작한다.
현실은 어떤가. 듣고 있으면 바보로 안다. 혀가 귀를 밀어낸 지 오래. 심지어 다변가(多辯家)가 달변가(達辯家)를 누른다. 말도 안 되는 말을 해놓고도 주워 담지 않는다. 또 다른 터무니없는 말로 지난 말을 덮어버린다. 듣기가 끼어들 틈이 없다. 맘을 찬찬히 들여다볼 심리적 조망권은커녕, 잠시 맘에 햇볕 쬘 일조권조차 내주지 않는다.
안 들으니 못 듣는다. 난청 사회다. 안 듣고 못 들으니
닫아버린다. 폐쇄 사회다. 멀쩡한 것 같은데 다들 가슴에 고름 주머니를 달고 산다. 20대 연예인들이 하루가 멀다고 세상 등지는 것도, 생활고 찌든 일가족이 애꿎은 목숨 저버리는 것도 아무도 듣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누군가 진심으로 경청했다면 달라졌을지 모른다. 이청득심(以聽得心). 들음으로써 마음을 얻는다. 잘 들어주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엔 빨간약이다.
자료출처 : 2019. 12. 6. 조선일보 게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12/05/201912050376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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