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성하는 敎育政治, 퇴화하는 敎育
'정치로부터 자율' 명분으로 정당 깃발 숨긴 채 派爭 계속
전교조·自私高도 본질 벗어나 편 갈라 對立만 확대·재생산
식견·역량 요구되는 교육계가 교육 정치인 투쟁의 場 되다니
우리의 교육계가 여전히 혼란스럽다. 이념 투쟁이나 교육 권력을 향한 정치적 파쟁(派爭)으로 소란스럽고, 교육부와 교육감들의 대립에 국가행정 체계마저 흔들릴 정도이다. 그러한 사태가 정치로부터 교육의 자율이라는 명분으로 정당의 깃발만 내려진 채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위선과 허구라는 이 시대 한국 정치의 단면도 드러나 있다. 그 혼란과 위선과 허구 속에서 '공(公)교육의 황폐화'란 말로 집약되는 교육 현장의 문란은 지속되고, 우리의 젊은 영혼들은 인생의 아름답고 소담한 시기에 영문도 모른 채 방황하면서 안타깝고 엉뚱한 시련들을 겪고 있다. 대체 최근 교육계의 쟁점들이 과연 교육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지 먼저 점검할 필요가 있다.
특정 교원 단체의 존재 자체에 법적인 문제가 있거나 그 구성원 일부에 직무상 일탈 행위 또는 불법적 행동이 있다면 그것은 행정처분이나 사법적 판단의 대상이지 정치적 파쟁의 원천이 될 이유는 없다. 일반고 교육에 대한 불신 때문에 대안 차원에서 시행하는 제도가 자사고라면 그 불신의 근원적인 해소 방안에 대해 함께 허심탄회하고 심도 있는 숙의(熟議)가 필요할 뿐 그 제도 자체가 정치적 선호의 대상은 아니다. 일선 학교장에 일임할 수도 있는 등교 시간 문제가 심각한 교육적 쟁점이자 정치적 논란의 원천으로 부각되고 있는 사실은 그 자체가 희화적이다. 결국 기존의 교육 제도나 방법, 내용에 대한 근본적이고 전반적인 반성이나 검토 없이 이미 정치적 편 가름으로 구획된 특정한 정책적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고수 또는 관철하려는 태도들이 교육계의 쟁점들을 교육적 차원의 해결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대립이나 투쟁의 대상으로 끝없이 확대 및 재생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에 정작 우리 교육의 실질적이고 절박한 문제들은 정책적 논의의 중심에서 팽개쳐 있다.
우리 교육은 주입식 교육이 지배하는 가운데 스스로 묻고 탐구하고 깨달아가는 과정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앎의 희열(喜悅)이 배움의 과정에서 원천적으로 박탈된 지 오래이며, 사고 능력의 함양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읽기 및 글쓰기 훈련마저 실질적으로 포기된 지 오래다. 예술과 체육 교육의 경시 속에서 아름다움을 체험하거나 고통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쾌락의 의미를 체득할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지도 오래다. 고전 교육을 통한 지적 성숙이 아니라 윤리 사상의 요약문이나 단편적인 문구들을 아는 체하게 만드는 수준의 윤리 교육 속에서 기본적인 예의범절을 지킬 줄도 모르고 충동적인 욕구도 억제할 줄도 모르는 인간을 양산한 지도 오래다. 그러는 가운데 즐거워야 할 공부가 배우는 이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된 지도 오래고, 인간을 진실로 잘나고 똑똑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과 무관한 과도한 성적 경쟁 속에서 가장 순수하고 정겨운 인간관계를 형성해야 할 시기의 청소년들이 인간에 대한 질시(嫉視)와 비하(卑下)의 감정부터 익히고 있는 지도 오래다. 그 오랜 교육적 적폐들 위에서 교육 정치는 번성하고 교육산업은 번창하는 기괴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오래전 노년의 칸트는 '교육론'에서 인간의 소업(所業)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교육과 정치라고 토로한 바 있다. 교육이라는 우리의 고질적인 국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정책의 시행은 일반적인 행정 능력 이상의 식견과 역량을 요구한다. 제대로 안다는 것이 무엇이고 진정으로 인간답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등 인간성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깊은 식견, 개인들의 다양한 잠재력을 최대한 발현시키면서 그들 각자가 나름대로 국가 및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시민이 되게 하는 방안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폭넓은 정신적 역량이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그러한 식견과 역량을 함께 갖춘 인물을 발견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교육정책의 책임자라면 적어도 그 심원하고 지난(至難)한 소업에 대한 경외감을 갖고 겸허하게 국민적 지혜를 모을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단견적인 정책들의 끝없는 남발이나 시행착오로 청소년들은 정신적으로 멍들고, '백년대계(百年大計)' 차원을 넘어 인간성의 영원한 요소인 교육은 '일년소계(一年小計)'의 유행 산업이 되고 마는 것이다.
교육정책이란 웬만한 인물이라면 누구라도 입안하고 집행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속 편하고 통속적인 사고가 현재의 정치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그렇지 않다면 교육계가 오늘처럼 교육 정치인들에 의한 권력 다툼의 장(場)이 되어버릴 이유가 없고, 개척시대 미국의 고립되고 분산된 지역 자치의 유물에 불과한 교육감 선거 제도가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에 있으며 국가 전체 차원의 일관되고 통일된 교육정책이 절실한 이 나라에 굳이 도입될 이유도 없기 때문이다. 조종사는 승객들의 생명을 책임지는 막중한 직책이지만 승객들이 서로 맡겠다고 나서지도 않고 그들의 투표로 뽑지도 않는다.
양승태 |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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