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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싶다… 소크라테스처럼

by 많은이용 2013. 11. 21.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싶다… 소크라테스처럼

                                                                    조선일보 어수웅 기자

[후학들이 연구하는 학자, 종교학자 정진홍 교수]
판사였던 아버지 인민군 손에 죽고 장남인 나는 종교 복지시설서 자라
그곳에서 종교인의 僞善 목격… 그 이유 알기 위해 종교학 공부
소크라테스가 毒杯를 받은 건 끊임없는 질문과 대화로 청년을 혼란에 빠뜨렸기 때문
왜 사는지 버는지, 스스로 물어보자

이틀 후인 22일 저녁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 한국의 대표적 종교학자들이 큰 소문 내지 않고 모인다. 윤승용 장석만 박규태 이진구 이용범 김대열 안신 이창익…. 이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이유는 선배이자 스승을 위한 논문집 헌정 때문. 그다음 날 희수(喜壽·77세)를 맞는 정진홍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인공이다. 책 제목은 '정직한 이삭줍기: 소전 정진홍 교수의 종교 연구'. 후학들이 자기 학문 취향으로 쓴 글이 대종을 이루는 헌정논문집 관행을 넘어, '정진홍'이라는 화두로 읽어낸 한국 종교학 성과의 최전선이다. 그는 "살아있는 사람을 난도질해놨어"라며 민망해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난다면 학문 공동체 울타리 안의 잔치일 뿐. 이를 넘어 한국의 종교학이 현대의 한국 사회에 줄 수 있는 성찰과 교훈은 무엇일까.

―종교를 공부하는 일은 천형(天刑)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무슨 뜻인가.

"종교는 그냥 나 자신을 봉헌하면 되는 거다. 그런데 종교학은 '알아야겠다'는 거 아닌가. 믿으면 편해질 일을 분석적으로 이해하겠다고 나서니 괴롭지. 그래서 종교가 제일 싫어하는 학문이 종교학이다. 묻지 말아야 할 걸 자꾸 물으니까(웃음)."

―본인은 힘들고, 종교는 싫어하는데 왜 선택했나.

"(잠시 망설이다) 어렸을 때 나는 사회복지 시설에서 자랐다. 종교인이 운영했다. 그런데 굉장히 위선적이었다. '종교는 좋은 건데 종교인과 제도는 왜 이리 나쁜가' 알고 싶었다. 문제가 분명한데 이를 피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다."

6·25가 터졌을 때 소년 정진홍은 열세 살이었다. 인민군은 판사였던 아버지를 대전형무소에 가뒀고, 북은 후퇴하면서 수감자 3000여명을 빠짐없이 처형했다. 시신도 찾지 못했다. 전쟁 이후 몸 누일 방 한 칸 변변치 않았던 집, 2남 5녀 중 장남. '판사 아버지'는 과거의 영광일 뿐이었다. 어머니는 동생들을 겨우 건사했고, 정진홍은 고아원에서 중·고교 6년을 다녔다. 그가 경험한 종교와 종교인 사이의 괴리와 격차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선생이 바라본 종교의 문제는.

"나는 크리스천이다. 하지만 믿지 못했다. 기독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불교가 오염되지 않는 연꽃으로 있어야 한다는 식의 말씀들. 세상이 망했으면 그 안의 종교도 망하는 게 당연하잖나. 세상이 부패했는데 우리 종교만은 그렇지 않다? 이런 자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참회는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의 종교가 그렇다. 정치·경제·문화가 모두 마찬가지. 왜 그럴까.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정직한 인식'이다. 자기 정당화가 아니라 자기 참회가 중요하다."

이분법과 진영 논리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종교학의 학문 태도는 시사점이 작지 않았다. 독선과 아집에 빠진 전통 종교와 자기만 옳다고 믿는 진영 논리의 신도(信徒)들 사이에서.

―당신의 종교학은 이 현실에 어떤 지혜를 줄 수 있을까.

"진영 논리 횡행 속에 빠져 있는 게 있다. '미래'다. 다들 지금, 이곳에서의 자기 정당화만 있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다른 차원으로 옮아갈 수 있다고 깨닫는다면 자기 입장만 고집할 수는 없겠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부족한 것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다. 종교도, 진영 논리도 참담한 자기 합리화에 빠져 있다. 양쪽에서 욕을 먹더라도 정직하게 자신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배워서 묻는 것이 아니라, 남의 물음을 묻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 문제가 뭔지를 알아야 한다. 종교는 바치면(commit) 그만, 위로받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종교를 '묻는 건' 감행(敢行)이다. 감히 물어야 한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믿기 싫은 건 생각의 울타리 밖으로 밀어내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요즘 세상에는 'Greedy talk(탐욕의 언어)'와 'Blame talk(비난의 언어)'만 난무하는 것 같다. 연봉 얼마 받나, 그건 얼마짜리냐. 게걸스러운 탐욕의 언어들이지. 또 전부 남 탓이다. 자기는 책임 없다는 거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관계는 단절시킨다. 내가 '책임 주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 사회 윤리와 개인의 실존 윤리를 늘 함께 고민할 수밖에 없다."

―마음만으로, 결심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물론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긍정적 사고의 가치를 너무 간과하는 것 같다. 비판만이, 부정만이 진정한 발언을 했다는 식의 풍조도 조금은 바뀌어야 한다."

지금 정 교수는 기금 6000억원을 운용하는 아산나눔재단 이사장. 몇 번을 고사하다 현대중공업 정몽준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때 고아원의 유년기를 언급했다. "도움만 받고 살았는데, 남 도울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게 신의 섭리인지도 모르겠다"면서. 정 회장은 "귀하게 자라신 줄만 알았다"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문득 집에서는 귀하게 자랐지만 사회에서는 귀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요즘 청년들로 생각이 이어졌다. 그는 소크라테스를 인용하면서 벤처기업 창업을 꿈꾸는 젊은이들 만난 이야기를 들려줬다.

"모두 돈 벌겠다는 이야기만 하더라. 하지만 그 이야기에 '왜'는 없었다. 나는 경제학도 모르고, 이념도 모르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그들에게 계속 물었다. 왜 돈을 벌어야 하는가. 왜 사는가. 지금은 너무나 반인간적인 구조 아닌가. 성공, 효도, 국가와 민족 이런 얘기만 하지 말고 돈 벌어 더불어 살자는 얘기 좀 하자. 기업들도 이런 얘기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받은 이유 중 하나는 '청년을 타락시켰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화하는 '산파술(産婆術)'로 청년들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것. 정 교수는 "위로도, 분노도, 노력도, 칭찬도 청년들에게는 백약이 무효인 것 같다"면서 "그래도 나는 소크라테스 편을 들겠다"고 했다. 그의 호 소전(素田)의 표면적 의미는 하얗게 텅 빈 밭. 동시에 이 텅 빈 밭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숨소리를 들으며 남들이 놓친 것을 찾겠다는 소박한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소전이 좀 더 많은 젊은이를 '타락'시킬 수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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