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록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류시화)

by 많은이용 2022. 8. 29.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류시화 지음/수오서재)

 

* 33

누군가 동행 없이 혼자 걷는다고 해서

외톨이의 길을 좋아한다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된다

길이 축복받았다고 느낄 때까지

누군가와 함께 걷고 싶었으나

가슴 안에 아직 피지 않은 꽃들만이

그의 그림자와 동행하는 것일 수도 있다

다음 봄을 기다리며

<누군가 침묵하고 있다고 해서> 일부분

 

* 34

<흉터의 문장>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지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 45

나는 두 방향으로 걸어간다

세상 속으로

그리고 나 자신 속으로

<파란 엉겅퀴> 일부분

 

* 65

상처에도 불구하고 사랑한다는 말보다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곁에 둔다.

<곁에 둔다> 일부분

 

* 67

나는 떠날 것이고

당신도 떠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공통점이다

그 밖의 것들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지금 살아남기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소멸로부터 살아남기가 아니라

봄까지 슬픔으로부터 살아남기에 대해

<살아남기> 일부분

 

* 84

<꽃의 결심>

꽃은 피어도 죽고

피지 않아도 죽는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을힘 다해

끝까지 피었다 죽으리

 

* 98

<잠깐 멈췄다 가야 해>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이 없을지도 모르거든.‘

 

누군가 이렇게 적어서 보냈다

내가 답했다

 

잠깐 멈췄다 가야 해,

내일은 이 꽃 앞에 없을지도 모르거든.‘

 

* 100

<비밀>

내가 세상에 등을 돌렸다고 당신은 말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내가 냉정하다고 당신은 느낀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열정을 찾은 것이다

 

내가 비현실적이라고 당신은 주장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현실에 눈뜬 것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당신은 오해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나를 받아들인 것이다

 

내가 노래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결론 내린다

그렇지 않다

나는 가슴의 음계를 따라가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의 즐거움을 잃었다고 당신은 단정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기쁨을 가슴에 품은 것이다

 

내가 기도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나무란다

그렇지 않다

나는 절대 순종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내가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당신은 판단한다

그렇지 않다

나는 다른 방식으로 더 깊이 사랑하는 것이다

 

* 135

<달에 관한 명상>

완전해야만 빛나는 것은

아니다

너는 너의 안에 언제나 빛날 수 있는

너를 가지고 있다

겉으로 보이는 너보다

더 큰 너를

 

달을 보라

완전하지 않을 때에도

매 순간 빛나는 달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