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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록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지음)

by 많은이용 2023. 2. 11.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박완서 지음/세계사 컨텐츠 그룹)

 

* 139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곧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다는 소리와 다름이 없습니다. 인간관계 속에서 남의 좋은 점을 발견해 버릇하면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이 되어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서로 사랑하게 되는 거지요. 사랑받을 만한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사는 게 곧 성공한 인생입니다. 서로 사랑하라고 예수님도 말씀하셨고 김수환 추기경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너희들 모두 행복하라는 말씀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 260

인간의 목숨이란 이렇게 치사하다. 참척의 고통은 인간이 질 수 있는 고통의 무게의 극한이다. 정말로 죽고 싶었던 것도

죽음만이 그 고통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이다. 그게 여의치 않자 그다음엔 저절로 죽어지려니 했던 것도 그 고통의 무게에 압사당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 만큼 나를 강하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각자가 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은 결코 주지 않는다는 말은 역시 맞는 말이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말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먹을 거 다 먹고, 새 옷도 사 입고, 남은 자식들의 작은 효도에 웃고, 조금만 섭섭하게 굴어도 삐치면서, 하고 싶은 소리 다 하고, 꽃 피면 즐겁고, 손자들 보면 대견하니 사람 할 짓은 다 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때때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처연해지곤 한다.

 

* 264

()가 없으면 미()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284

나는 내 마지막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허둥대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아름다운 것을 봐두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이 허락해주는 한 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 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 허락될까. 허락된다면 그때는 언제쯤일까. 10년 후쯤일 될까, 20년 후쯤이 될까, 몇 년 후라도 좋으니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싶다.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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